예전에 쓴 글인데, 다른 곳에 올렸던 것을 블로그로 옮깁니다.
뭐어, 이미 안면몰수하기로 했고 말이지요.
Chilled Factor
1. 등산 1
산. 아니, '산'이라고만 칭한다면 충분치 않다. 인간의 발이, 아니 시선이 닿았던 모든 산중에 가장 높은 산이며, 아직도 그 화산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기에 '불의 산' 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활화산 아브라디넬. 그 초입보다는 약간 더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상까지는 아직 까마득할 정도로 먼, 그래서 정확히 어디라고 칭하기는 애매한 기슭 언저리에서 어렵사리 조그만 불빛이 피어나며 한 가닥 가느다란 연기를 올려 노을을 휘저었다. 곧 꺼져갈 듯 희미한 붉은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은 천천히 어두운 푸른색의 바다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느릿하지만 확고한 걸음걸이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제도, 그 전날에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듯이.
자기가 피운 연기를 들여 마시고는 캑캑거리며 나앉은 사람의 눈에 매운 눈물이 맺혔다. 그는 눈을 슥 닦고는(가죽 장갑 때문에 눈이 더 아파지기만 했다) 거의 생나무나 다를 바 없는 덜 마른 나무를 장작으로 써서 연기만 가열차게 뿜어내고 정작 불꽃은 시원찮은 모닥불을 한 번 살펴보았다. 탁탁 튀는 나무 소리를 들으며 한심하다는, 혹은 한심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는 곧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입고 있던 판금갑주가 가볍게 절그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가히 풀 플레이트라 부를 만한 육중한 중장갑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그 착용자의 몸놀림과 대비를 이루었다. 물론 보는 눈이 있는 자라면 그 갑주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지만(애시당초 풀 플레이트같은 쇳덩이를 입고 걸어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리고 그 갑주의 흉갑부위는 철이 아닌 다른 금속의 광택을 내고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알아 챌 수 있었을 것이고.
돌아보는 눈에 주위의 풍경이 들어온다.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는 죽어버린 듯한 산의 저녁. 이상한 낌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가 3분 내로 갑자기 습격해 올 듯한 낌새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약간 떨군 채 기도하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음색과 울림. 마치 이 땅의 누구도 이미 쓰고 있지 않을 것같은 언어였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그런 언어.
주변의 기류가 미묘하게 변화하며 가벼운 위화감을 형성했다. 약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묘한 구석이 있는 역장이 펼쳐진 것이다.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종의 결계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다. 웬만한 몬스터의 접근을 차단하고, 웬만하지 않은 몬스터가 접근 할 때에는 그를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불을 끈다고 해서 몬스터들이 습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일이라, 그는 이런 방법을 써서 주변을 경계하곤 했다.
이 정도면 '오늘의 일례 행사' 는 일단 마친 셈이었다. 몬스터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이 저주받은 화산 아브라디넬과 그 심장부로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자신의 작태, 또한 불침번 설 동료 하나 없는, 아니 없을 수밖에 없는 자기 신세, 덤으로 가히 가련하다 할 만한 선을 간심히 넘어서고 있는 영양상태등을 다 합쳐서 종합적으로 푸념 비슷하게 궁시렁 거리면서, 그는 갑옷을 다 벗어놓고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불 앞에 앉았다. 꺼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맵디 매운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목에 걸린 성표의 반짝임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성표로 말할 것 같으면, 누가 봐도 꽤나 내력 있어 보이는 물건이다.
그때, 그러니까 그가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켁켁거리)던 때에,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울렸다.
"어이, 힐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신기할 뿐 아니라 불쾌하거나 공포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힐렐은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많이 있던 일이니까. 그는 당황하는 대신 그가 하루종일 등에 메고 다니던 꾸러미에 시선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뭐냐, 라인"
라인. 라인 블러디블레이드. 몇 백 년인가 전부터(역사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약 700여전 전이며, 그중에서도 다수설을 형성하고 있는것은 694년전부터라는 견해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수많은 기괴한 전설과 기이한 야사의 근원이 되었고 그보다도 더 많은 헛소문을 낳은 검. 그동안 취해온 생명과 먹은 - 말 그대로 '먹은' - 피의 양이 지독히도 많기에 '블러디블레이드' 라는 이름을 얻은 마검이다. 지나치게 넓어보이는 날이 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뒤로 살짝 굽어있어, 전체적으로 길쭉한 삼각형을 구부려놓은 듯한 모습을 한 외날의 곡도. 칼막이의 앞쪽은 마치 갑옷의 일부라도 되는 양 넓게 퍼져 손 앞쪽을 방어하고, 반대쪽은 위로 솟아있다. 물론 가장 기이한것은 마치 박쥐의 날개와 흡사한 형상의 날개 2장이 그 밑에 붙어있다는 것이다. 실용성 같은것은 전혀 없지만. 새의 발을 연상시키는 손잡이의 끈에는 역시 새의 발톱과 흡사한 커다란 검은 발톱이 튀어나와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은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꾸러미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라인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냥."
아무리 자기 좋아서 가는 거라고는 해도 '죽으러'(칼이 죽는다고 할 수 있다면) 가는 길에 이런 속 편한 소리를 하기는 힘들것이다. 그러나 검의 정신세계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그냥 여행이라고 한다면, 꽤나 심심할 만 하기도 할것이다. 둘둘 묶여서 끌려오기만 했을 뿐 아니라, 라인, 저 '검'은 며칠째 그 흔한(이곳에서는 정말 흔한) 몬스터 한마리 베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라이트브링거, 정확히 말해 성기사 힐렐 '라이트브링거' 라카이드가 마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쓰려고 갖고다니는 것도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좀 휘둘러본다고 뭐 어떨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라인을 쥐었던 인간(물론, '인간'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들의 말년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별로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다. 사실 라인도 그정도는 알고 있는 일이어서, 그냥 심심해서 떠드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비록 마검이라 하더라도 떠들고 싶어하는 녀석에게 맞장구 쳐주는 일 정도는 못할 것 없는 일이다. 그래서 힐렐은 라인의 기대대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그냥. 심심해서' 라고들 하지 않나?"
"너는 왜 내 모순형용의 미학을 이해 못하는게냐?"
"'그건 모순형용이라고는 부르지 않아' 라는 식으로는 대답하지 않겠어. 더 말려들기도 귀찮으니. 그나저나 네녀석은 입만 열면(순전히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헛소리군. 슬슬 질릴때도 되지 않았어? 너무 오래 살아서 치매라도 걸린거 아니야?"
라인은 잠깐 생각하다가(이것도, 말하자면, 수사적인 표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것이다) 웃기로 했다. 말하기도 귀찮은 사실이긴 하지만, 뇌도 없는 마법검이 뇌질환에 걸릴 리는 없다.
"하, 하, 하. 재미있는 농담이다. 치매걸린 마법검이라"
"...그렇게 딱딱 끊어서 비웃지 않아도 놀리고 있다는거 다 안다. 젠장"
"오, 벌써 패배를 인정하는건가? 빠르군. 오늘도 끝없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악이 '또한번'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도다"
"어제도 자기가 이겼다는듯한 말투로군 그래"
"으흠? 으흐흠? 수신 상태가 불량하와 잘 들리지 않는군요. 귀찮으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면 무한히 감사하겠는데요"
힐렐은 슬슬 라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밤새도록 마검과 농담 따먹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는 이쯤에서 적당히 끊어주기로 했다.
"하아, 오늘은 꽤 피곤한걸. 일찍 밥먹고 잠이나 자야겠어"
"호오. 도망이군. 성기사 주제에 이 악의 파도 앞에 꼬리를 내리고 도망이나 치겠다는 말이지?"
"역시 잘 들리는 거였군. 이제 슬슬 조용히 하시지. 듣기도 지겨우니"
"잘테면 자라구. 적당한 몬스터놈 하나 조종해서 네녀석 자는 사이에 목을 찌르는 것은 일도 아니니"
힐렐은 화를 내거나 쓸데없이 열렬하게 부정하거나 하는 대신에,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천천히 말했다.
"물론 일도 아니겠지.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속 그러면 버리고 가 주지. 즐겁게 살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죽음을 원하는 마검은 입을 다물었고, 신을 섬기는 금발의 검사는 자신이 이뤄낸 작은 고요에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 몇가지를 저울질 해 보던 힐렐은, 수면욕과 게으름이 식욕을 압도한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냥 자버렸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흰 빛을 뿜어내며 해의 길을 잰걸음으로 뒤쫓고 있었다.
***
어제도, 그 전날에도 그러했듯이,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그야말로 쾌청해서 기분좋은 온기가 부드럽게 피부를 감싼다. '좋은 아침!'이란 인사를 하기 할 이상적인 아침 날씨라고 할 만한, 이 저주받은 산에선 정말 보기힘든 좋은 날씨다.
그러나 세상은 상식대로만 되는게 아니라고 할까, 아니면 행복량 보존의 법칙은 여전히 훌륭하게 지켜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상쾌한 아침에도 상쾌하지 못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 상쾌하지 못한 사람중 하나에 속하는 인간이 무덤에서 일어나듯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좀비가 몸을 일으키듯 현실감이 결여된 동작이었다.
힐렐은 다 일어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차피 위생 같은 것에야 애초에 신경도 쓸 수 없는 상황이고(마실 물도 달랑달랑했다), 편안한 잠자리 따위도 해당사항 밖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충분한 수면' 이란것은 취한 터라 그에 따른 당연한 효과인 '피로의 회복'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터였는데, 자고 일어난 뒤에 오히려 더 피곤해졌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정신이 약간씩 돌아오면서 공복감마저 또렷이 느껴져왔기에, 그의 기분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지금이야말로 온당한 분노의 때. 힐렐은 생각했다. 명색이 마검인 주제에 말싸움에서 졌다고 남 잘 자는데 꿈속에 들어와서 괴롭혀? 그가 꿈속에서 잡은 몬스터 수는 정확히 칠천팔백서른세마리였다. 그 목록을 하나 하나 밝히는 등의 구차한 일을 할 생각은 없으나 그사이 불쌍한 힐렐씨가 구백여든일곱번 죽음을 맞았다는 것만 말 해 두자. 핏빛으로 빛나는 마검 라인을 들고 하찮은 고블린들을 도륙하다가 하늘에서 날아온 화염의 브레스를 세번째로 맞고 이백스물세번째 죽었던 부분까지 회상을 하던 힐렐은, 정신을 차리고 천꾸러미를, 그러니까 라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노려보고는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대답해보시지, 라인"
침묵.
"입도 없으면서 잘만 떠들어대더니 오늘은 말이 없군. 네녀석의 저질스런 취향을 나한테 강요하는게 그리 즐겁더냐?"
여전히, 침묵.
"허어, 입 다물고 계시겠다? 발뺌이라도 하려고?"
당연하다는듯이 침묵.
"야, 이 우라질 자식아아! 뭐라고 뻐끔거리기라도 하란 말이다! 나만 바보 만들지 말고!"
순간 말려들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힐렐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 해봐야 이득도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든 데다가 전날 저녁을 안먹어서 기력도 없었기에, 그는 보다 더 실용적인 일. 즉 밥 차려먹고 짐싸서 다시 길 떠나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쨌든 결국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힐렐은 기분이 나빠졌다.
얼굴을 감싸는 따스한 햇볕, 눈앞을 어지럽히는 장난스러운 햇빛의 조화. 상쾌한 아침의 산길이다. 밤새 잎을 접고있던 식인식물들이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 잎을 활짝 펴고,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기운찬 오크들의 전투 함성과 아침 체조 대용으로 바위를 던지는 언덕 거인의 즐거운 콧노래가 여정에 즐거움을 더하며 어디에선가 산뜻한 유황 냄새가 코끝을 가볍게 자극하는 활기찬 산의 아침... 은 아닌 평범한, 평범해서 이런 장소에서는 더욱 상큼한 아침 길이었지만, 지난 이틀간 하루에 세 번 꼴로 전투를 치른 그로서는 '상쾌한 아침이군' 따위의 말은 당장 신께서 강림한다 해도 입밖으로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하물며 등에 메고 있는 라인이 계속 낄낄대고 있음에야. 더군다나 라인이 킬킬대는 소리를 숨기려고 하는 척(다시말해 결국은 다 들리게)하는것이 그의 신경줄을 더더욱 긁어대고 있었다. 그는 라인에게 저주를 퍼부으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어쨌거나 라이트브링거의 저주라는 것은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정도는 실현되는 것이 사실이며, 함부로 하는 저주는 그 지대한 부작용 때문에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두면 노년에 화병으로 고생하게 되는 법. 그는 조용히 욕설을 퍼붓는 쪽을 택했다. 궁시렁궁시렁.
즐겁게 듣고있던 라인이 즐거운 목소리로 즐겁게 입을 열었다(한번 더 말하지만, 순전히 수사적인 표현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시 선대 라이트브링거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군"
라인과는 대조적으로, 열받았던 힐렐은 열받은 표정을 짓고 열받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워워억! 너 잘 만났다! 아니, 잘 나왔다! ...아니, 으... 그러니까..."
열받은 사람답게 더듬거렸다는 것은 힐렐에겐 불행이었다.
"대충 말하라구. 어차피 네가 하는 말인데 뭐 그러냐. 좀 틀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 있어"
이쯤되면 말려도 단단히 말린 셈이다.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힐렐은 별 수 없이 침묵의 서원을 한 성직자처럼 조용히 있기로 했다. 대개의 경우, 속담에서 말하듯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 '대개의 경우' 에 속하지 않는다는것은 힐렐에겐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마검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인간과는 달라서, 잘 지치지를 않는 것이다. 라인은 힐렐을 몇번 더 찔러보다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전략을 약간 바꾸었다. 자못 근엄한 목소리로 라인이 입을 열었다.
"삐졌군."
'삐졌군'이라 함은, 애석하게도 반론 불가능에 가까운 강력한 착취 논리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요컨대, 보통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거의 다 이 '삐졌군'의 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어? 삐져서 말도 안하냐?', '그렇게 툴툴거리는걸 보니 확실히 삐졌군', '삐졌다는거 들킬까봐 평소보다 조용하게 말하는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이, 안 삐진척 하기는'). 슬프게도 의사능력이 70%정도 상실된 힐렐은 이와 같은 논리적 추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리고는 흔히 볼 수 있는 애들 자존심 싸움, 다시 말해 약간 슬플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지도 장하지도 않은 3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10분도 지나지 않아 힐렐은 폭발하고 말았다.
"쿠훼우훼에에우어훠훠어억!"
표준어를 정한다는 소위 양식있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언어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무언가'(괴성이라는 말이 가장 유사하겠다)를 내뱉고 나서, 힐렐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땅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장갑을 끼고 있으니 손톱밑에 돌조각이 들어가 고생할 염려는 없지만, 모래밭도 아닌데 나뭇가지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글씨가 써질 리도 없다.
정확히 5분 하고도 17초 뒤에 라인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물론 물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수사학적으로.
"알았다. 잘못했다. 가자. 빨리 날 죽여야 될 것 아니냐."
정신연령이 7세까지 퇴행되어 가던 힐렐이 눈물 가득한(은 약간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눈을 초롱초롱거리면서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정말?"
"응. 잘못했다. 가자. 알았지? '네'가 잘못했다. '네'가 잘못했다니까."
"응!"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키던 힐렐은 약 8.9초 후 정신연령이 70%, 즉 19세 가량으로 회복되면서 라인이 했던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채고는 슬픈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철푸덕.
역시 대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야. 라는 식의 헛소리를 잠시 내뱉던 힐렐은 지면의 부드러운 촉감을 온 얼굴로 느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라인"
"응?"
"너 내가 싫지?"
"응. 당연하지"
좀 지나치게 지친 터라, 힐렐에겐 화 낼 기력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힐렐은 침착한 목소리로 라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이젠 슬슬 해탈의 경지에 다가서는 것 같군. 근데 왜 내가 그리 싫다는거야? 네녀석 소원 들어주겠다는 건데"
"그럼 '성기사를 사랑하는 마검' 같은 농담이라도 기대한거냐. 게다가 소원이래봤자 결국은 살해계획일 뿐인데 죽여줘서 고맙다고까지 하라고?"
"응. 넌 그래야 하잖아. 게다가 생명이 없으니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 '살해'도 아니고"
"...좀 늘었군. 알았다. 길이나 떠나자"
마지막에 비겼으니 오늘의 말싸움은 비긴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힐렐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힘겹게 발을 뗐다. 아직 아침인데 쓸데없이 피곤한건 잠을 설친데다가 말싸움으로 초토화를 당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애써 연이은 패배를 무시해가며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며 힐렐의 등 위에 짐을 더해가고 있었다.
***
"...졸린걸"
전투 아니면 단조로운 풍경이라는 것은 꽤나 가혹한 환경이다. 도대체 흥미같은 것이 생길 수가 없는것이다. 날씨가 좋기는 하지만 더군다나 전날에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오죽하겠는가. 최악에 근접한 기분으로 걷던 힐렐은 결국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물론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대답이 나오면 그게 오히려 곤란하다.
"아, 그러셔"
곤란해지는 이유는 이 산에서 대답할 만한 것이 등에 메고 있는 라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700년 묵은 마검이라는 것은, 대화를 한다고 해서 이익이 생길 상대가 아니다. 그 700년이 그것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라인 한 번 쥐어본 사람치고, 제명에 죽은 인간이 없다.
"시끄러. 댁한테 말한거 아니니 신경 꺼"
이렇게 말하면서도 힐렐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까지 라인을 쥐었다가 죽은 인간들은 다들 말싸움하다가 신경쇠약으로 죽은건 아닐까? 그 가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신에게는 상당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그리고 그 가설이 석득력있게 들렸다는 사실은, 슬프게도 힐렐의 신경쇠약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러셔"
"칵... 아니, 됐다. 내가 바보지"
"응. 넌 바보야. 깨닫는게 느리군. 뭐, 이제 알긴 알았으니 다행이랄까?"
역시 자기비하란 것은 좋지 않다. 분개하려던 힐렐은 어차피 또 말싸움을 시작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라인의 입을 막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원래 같은 수법이 두 번은 통하지 않는 녀석이니 이번엔 버리고 간다고 해도 소용은 없을것이다.
뒤집어서 생각하자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계속 혼자 떠들게 만들면 되는 일이다. 700년 묵은 늙은이니 혼자 떠들라고 놔두면 아마 끝도없이 잘 떠들겠지. 듣는척 해주는게 말싸움해서 판판히 깨지는 것 보다야 백번 낫다. 여러모로 완벽한 계획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어쨌거나 힐렐이 말했다.
"야아, 라인"
"칠년 못본 친구 만난듯한 반가운 말투군. 아침 먹은게 잘못됐나? 아니면 조금 삐딱하게 삐졌나?"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도, 졸린데 뭐 이야깃거리 같은거라도 없어? 쓸데없이 오래 살았으니 뭐 있을거 아냐"
"있긴 한데 네녀석이 갑자기 느물거리니까 말하기 싫군그래"
요컨대, 이정도면 이미 반은 성공이다. 힐렐을 마음속으로 '인내!' 라고 외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뭐 굳이 그럴건 없잖냐. 말은 그렇게 해도 입이 근질거리지 않아? 게다가 내가 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라도 들면 너도 손해잖아?"
"허허. 이 젊은이가 갑자기 왜 이러나. 내 700년의 역사를 듣고싶다 이건가?"
늙은이 티 내긴. 그러니까 그 얘기가 하고싶었던 거군. 하고 힐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응. 들려줘"
"허어, 이렇게 희소성 높은 이야기를 공으로 들으려고?"
라인은 한번 더 튕겨보았다. 사실 희소성 높은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힐렐은 어차피 이야기의 내용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아, 아, 그래. 이번엔 한 번 져주지"
이야기가 굉장히 하고싶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라인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져주겠는가.
"빼지 말고, 이야기나 시작해 봐"
"후우, 그런가. 어떤 이야기부터 해볼까?"
2000년 07월 18일에 씀
2004년 09월 10일에 최종수정
아아, 묵은 티가 좀 나는군요, 이거.
하기사 2000년이면 고3때고...
어라라, 잘도 이런 걸 쓰고 앉아있었군요.
뭐어, 이미 안면몰수하기로 했고 말이지요.
그럼 한 번 보실까요
Chilled Factor
1. 등산 1
산. 아니, '산'이라고만 칭한다면 충분치 않다. 인간의 발이, 아니 시선이 닿았던 모든 산중에 가장 높은 산이며, 아직도 그 화산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기에 '불의 산' 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활화산 아브라디넬. 그 초입보다는 약간 더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상까지는 아직 까마득할 정도로 먼, 그래서 정확히 어디라고 칭하기는 애매한 기슭 언저리에서 어렵사리 조그만 불빛이 피어나며 한 가닥 가느다란 연기를 올려 노을을 휘저었다. 곧 꺼져갈 듯 희미한 붉은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은 천천히 어두운 푸른색의 바다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느릿하지만 확고한 걸음걸이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제도, 그 전날에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듯이.
자기가 피운 연기를 들여 마시고는 캑캑거리며 나앉은 사람의 눈에 매운 눈물이 맺혔다. 그는 눈을 슥 닦고는(가죽 장갑 때문에 눈이 더 아파지기만 했다) 거의 생나무나 다를 바 없는 덜 마른 나무를 장작으로 써서 연기만 가열차게 뿜어내고 정작 불꽃은 시원찮은 모닥불을 한 번 살펴보았다. 탁탁 튀는 나무 소리를 들으며 한심하다는, 혹은 한심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는 곧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입고 있던 판금갑주가 가볍게 절그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가히 풀 플레이트라 부를 만한 육중한 중장갑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그 착용자의 몸놀림과 대비를 이루었다. 물론 보는 눈이 있는 자라면 그 갑주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지만(애시당초 풀 플레이트같은 쇳덩이를 입고 걸어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리고 그 갑주의 흉갑부위는 철이 아닌 다른 금속의 광택을 내고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알아 챌 수 있었을 것이고.
돌아보는 눈에 주위의 풍경이 들어온다.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는 죽어버린 듯한 산의 저녁. 이상한 낌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가 3분 내로 갑자기 습격해 올 듯한 낌새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약간 떨군 채 기도하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음색과 울림. 마치 이 땅의 누구도 이미 쓰고 있지 않을 것같은 언어였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그런 언어.
주변의 기류가 미묘하게 변화하며 가벼운 위화감을 형성했다. 약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묘한 구석이 있는 역장이 펼쳐진 것이다.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종의 결계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다. 웬만한 몬스터의 접근을 차단하고, 웬만하지 않은 몬스터가 접근 할 때에는 그를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불을 끈다고 해서 몬스터들이 습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일이라, 그는 이런 방법을 써서 주변을 경계하곤 했다.
이 정도면 '오늘의 일례 행사' 는 일단 마친 셈이었다. 몬스터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이 저주받은 화산 아브라디넬과 그 심장부로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자신의 작태, 또한 불침번 설 동료 하나 없는, 아니 없을 수밖에 없는 자기 신세, 덤으로 가히 가련하다 할 만한 선을 간심히 넘어서고 있는 영양상태등을 다 합쳐서 종합적으로 푸념 비슷하게 궁시렁 거리면서, 그는 갑옷을 다 벗어놓고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불 앞에 앉았다. 꺼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맵디 매운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목에 걸린 성표의 반짝임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성표로 말할 것 같으면, 누가 봐도 꽤나 내력 있어 보이는 물건이다.
그때, 그러니까 그가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켁켁거리)던 때에,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울렸다.
"어이, 힐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신기할 뿐 아니라 불쾌하거나 공포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힐렐은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많이 있던 일이니까. 그는 당황하는 대신 그가 하루종일 등에 메고 다니던 꾸러미에 시선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뭐냐, 라인"
라인. 라인 블러디블레이드. 몇 백 년인가 전부터(역사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약 700여전 전이며, 그중에서도 다수설을 형성하고 있는것은 694년전부터라는 견해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수많은 기괴한 전설과 기이한 야사의 근원이 되었고 그보다도 더 많은 헛소문을 낳은 검. 그동안 취해온 생명과 먹은 - 말 그대로 '먹은' - 피의 양이 지독히도 많기에 '블러디블레이드' 라는 이름을 얻은 마검이다. 지나치게 넓어보이는 날이 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뒤로 살짝 굽어있어, 전체적으로 길쭉한 삼각형을 구부려놓은 듯한 모습을 한 외날의 곡도. 칼막이의 앞쪽은 마치 갑옷의 일부라도 되는 양 넓게 퍼져 손 앞쪽을 방어하고, 반대쪽은 위로 솟아있다. 물론 가장 기이한것은 마치 박쥐의 날개와 흡사한 형상의 날개 2장이 그 밑에 붙어있다는 것이다. 실용성 같은것은 전혀 없지만. 새의 발을 연상시키는 손잡이의 끈에는 역시 새의 발톱과 흡사한 커다란 검은 발톱이 튀어나와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은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꾸러미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라인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냥."
아무리 자기 좋아서 가는 거라고는 해도 '죽으러'(칼이 죽는다고 할 수 있다면) 가는 길에 이런 속 편한 소리를 하기는 힘들것이다. 그러나 검의 정신세계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그냥 여행이라고 한다면, 꽤나 심심할 만 하기도 할것이다. 둘둘 묶여서 끌려오기만 했을 뿐 아니라, 라인, 저 '검'은 며칠째 그 흔한(이곳에서는 정말 흔한) 몬스터 한마리 베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라이트브링거, 정확히 말해 성기사 힐렐 '라이트브링거' 라카이드가 마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쓰려고 갖고다니는 것도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좀 휘둘러본다고 뭐 어떨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라인을 쥐었던 인간(물론, '인간'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들의 말년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별로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다. 사실 라인도 그정도는 알고 있는 일이어서, 그냥 심심해서 떠드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비록 마검이라 하더라도 떠들고 싶어하는 녀석에게 맞장구 쳐주는 일 정도는 못할 것 없는 일이다. 그래서 힐렐은 라인의 기대대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그냥. 심심해서' 라고들 하지 않나?"
"너는 왜 내 모순형용의 미학을 이해 못하는게냐?"
"'그건 모순형용이라고는 부르지 않아' 라는 식으로는 대답하지 않겠어. 더 말려들기도 귀찮으니. 그나저나 네녀석은 입만 열면(순전히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헛소리군. 슬슬 질릴때도 되지 않았어? 너무 오래 살아서 치매라도 걸린거 아니야?"
라인은 잠깐 생각하다가(이것도, 말하자면, 수사적인 표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것이다) 웃기로 했다. 말하기도 귀찮은 사실이긴 하지만, 뇌도 없는 마법검이 뇌질환에 걸릴 리는 없다.
"하, 하, 하. 재미있는 농담이다. 치매걸린 마법검이라"
"...그렇게 딱딱 끊어서 비웃지 않아도 놀리고 있다는거 다 안다. 젠장"
"오, 벌써 패배를 인정하는건가? 빠르군. 오늘도 끝없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악이 '또한번'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도다"
"어제도 자기가 이겼다는듯한 말투로군 그래"
"으흠? 으흐흠? 수신 상태가 불량하와 잘 들리지 않는군요. 귀찮으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면 무한히 감사하겠는데요"
힐렐은 슬슬 라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밤새도록 마검과 농담 따먹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는 이쯤에서 적당히 끊어주기로 했다.
"하아, 오늘은 꽤 피곤한걸. 일찍 밥먹고 잠이나 자야겠어"
"호오. 도망이군. 성기사 주제에 이 악의 파도 앞에 꼬리를 내리고 도망이나 치겠다는 말이지?"
"역시 잘 들리는 거였군. 이제 슬슬 조용히 하시지. 듣기도 지겨우니"
"잘테면 자라구. 적당한 몬스터놈 하나 조종해서 네녀석 자는 사이에 목을 찌르는 것은 일도 아니니"
힐렐은 화를 내거나 쓸데없이 열렬하게 부정하거나 하는 대신에,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천천히 말했다.
"물론 일도 아니겠지.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속 그러면 버리고 가 주지. 즐겁게 살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죽음을 원하는 마검은 입을 다물었고, 신을 섬기는 금발의 검사는 자신이 이뤄낸 작은 고요에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 몇가지를 저울질 해 보던 힐렐은, 수면욕과 게으름이 식욕을 압도한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냥 자버렸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흰 빛을 뿜어내며 해의 길을 잰걸음으로 뒤쫓고 있었다.
어제도, 그 전날에도 그러했듯이,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그야말로 쾌청해서 기분좋은 온기가 부드럽게 피부를 감싼다. '좋은 아침!'이란 인사를 하기 할 이상적인 아침 날씨라고 할 만한, 이 저주받은 산에선 정말 보기힘든 좋은 날씨다.
그러나 세상은 상식대로만 되는게 아니라고 할까, 아니면 행복량 보존의 법칙은 여전히 훌륭하게 지켜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상쾌한 아침에도 상쾌하지 못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 상쾌하지 못한 사람중 하나에 속하는 인간이 무덤에서 일어나듯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좀비가 몸을 일으키듯 현실감이 결여된 동작이었다.
힐렐은 다 일어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차피 위생 같은 것에야 애초에 신경도 쓸 수 없는 상황이고(마실 물도 달랑달랑했다), 편안한 잠자리 따위도 해당사항 밖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충분한 수면' 이란것은 취한 터라 그에 따른 당연한 효과인 '피로의 회복'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터였는데, 자고 일어난 뒤에 오히려 더 피곤해졌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정신이 약간씩 돌아오면서 공복감마저 또렷이 느껴져왔기에, 그의 기분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지금이야말로 온당한 분노의 때. 힐렐은 생각했다. 명색이 마검인 주제에 말싸움에서 졌다고 남 잘 자는데 꿈속에 들어와서 괴롭혀? 그가 꿈속에서 잡은 몬스터 수는 정확히 칠천팔백서른세마리였다. 그 목록을 하나 하나 밝히는 등의 구차한 일을 할 생각은 없으나 그사이 불쌍한 힐렐씨가 구백여든일곱번 죽음을 맞았다는 것만 말 해 두자. 핏빛으로 빛나는 마검 라인을 들고 하찮은 고블린들을 도륙하다가 하늘에서 날아온 화염의 브레스를 세번째로 맞고 이백스물세번째 죽었던 부분까지 회상을 하던 힐렐은, 정신을 차리고 천꾸러미를, 그러니까 라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노려보고는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대답해보시지, 라인"
침묵.
"입도 없으면서 잘만 떠들어대더니 오늘은 말이 없군. 네녀석의 저질스런 취향을 나한테 강요하는게 그리 즐겁더냐?"
여전히, 침묵.
"허어, 입 다물고 계시겠다? 발뺌이라도 하려고?"
당연하다는듯이 침묵.
"야, 이 우라질 자식아아! 뭐라고 뻐끔거리기라도 하란 말이다! 나만 바보 만들지 말고!"
순간 말려들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힐렐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 해봐야 이득도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든 데다가 전날 저녁을 안먹어서 기력도 없었기에, 그는 보다 더 실용적인 일. 즉 밥 차려먹고 짐싸서 다시 길 떠나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쨌든 결국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힐렐은 기분이 나빠졌다.
얼굴을 감싸는 따스한 햇볕, 눈앞을 어지럽히는 장난스러운 햇빛의 조화. 상쾌한 아침의 산길이다. 밤새 잎을 접고있던 식인식물들이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 잎을 활짝 펴고,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기운찬 오크들의 전투 함성과 아침 체조 대용으로 바위를 던지는 언덕 거인의 즐거운 콧노래가 여정에 즐거움을 더하며 어디에선가 산뜻한 유황 냄새가 코끝을 가볍게 자극하는 활기찬 산의 아침... 은 아닌 평범한, 평범해서 이런 장소에서는 더욱 상큼한 아침 길이었지만, 지난 이틀간 하루에 세 번 꼴로 전투를 치른 그로서는 '상쾌한 아침이군' 따위의 말은 당장 신께서 강림한다 해도 입밖으로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하물며 등에 메고 있는 라인이 계속 낄낄대고 있음에야. 더군다나 라인이 킬킬대는 소리를 숨기려고 하는 척(다시말해 결국은 다 들리게)하는것이 그의 신경줄을 더더욱 긁어대고 있었다. 그는 라인에게 저주를 퍼부으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어쨌거나 라이트브링거의 저주라는 것은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정도는 실현되는 것이 사실이며, 함부로 하는 저주는 그 지대한 부작용 때문에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두면 노년에 화병으로 고생하게 되는 법. 그는 조용히 욕설을 퍼붓는 쪽을 택했다. 궁시렁궁시렁.
즐겁게 듣고있던 라인이 즐거운 목소리로 즐겁게 입을 열었다(한번 더 말하지만, 순전히 수사적인 표현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시 선대 라이트브링거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군"
라인과는 대조적으로, 열받았던 힐렐은 열받은 표정을 짓고 열받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워워억! 너 잘 만났다! 아니, 잘 나왔다! ...아니, 으... 그러니까..."
열받은 사람답게 더듬거렸다는 것은 힐렐에겐 불행이었다.
"대충 말하라구. 어차피 네가 하는 말인데 뭐 그러냐. 좀 틀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 있어"
이쯤되면 말려도 단단히 말린 셈이다.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힐렐은 별 수 없이 침묵의 서원을 한 성직자처럼 조용히 있기로 했다. 대개의 경우, 속담에서 말하듯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 '대개의 경우' 에 속하지 않는다는것은 힐렐에겐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마검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인간과는 달라서, 잘 지치지를 않는 것이다. 라인은 힐렐을 몇번 더 찔러보다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전략을 약간 바꾸었다. 자못 근엄한 목소리로 라인이 입을 열었다.
"삐졌군."
'삐졌군'이라 함은, 애석하게도 반론 불가능에 가까운 강력한 착취 논리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요컨대, 보통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거의 다 이 '삐졌군'의 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어? 삐져서 말도 안하냐?', '그렇게 툴툴거리는걸 보니 확실히 삐졌군', '삐졌다는거 들킬까봐 평소보다 조용하게 말하는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이, 안 삐진척 하기는'). 슬프게도 의사능력이 70%정도 상실된 힐렐은 이와 같은 논리적 추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리고는 흔히 볼 수 있는 애들 자존심 싸움, 다시 말해 약간 슬플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지도 장하지도 않은 3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10분도 지나지 않아 힐렐은 폭발하고 말았다.
"쿠훼우훼에에우어훠훠어억!"
표준어를 정한다는 소위 양식있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언어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무언가'(괴성이라는 말이 가장 유사하겠다)를 내뱉고 나서, 힐렐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땅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장갑을 끼고 있으니 손톱밑에 돌조각이 들어가 고생할 염려는 없지만, 모래밭도 아닌데 나뭇가지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글씨가 써질 리도 없다.
정확히 5분 하고도 17초 뒤에 라인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물론 물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수사학적으로.
"알았다. 잘못했다. 가자. 빨리 날 죽여야 될 것 아니냐."
정신연령이 7세까지 퇴행되어 가던 힐렐이 눈물 가득한(은 약간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눈을 초롱초롱거리면서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정말?"
"응. 잘못했다. 가자. 알았지? '네'가 잘못했다. '네'가 잘못했다니까."
"응!"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키던 힐렐은 약 8.9초 후 정신연령이 70%, 즉 19세 가량으로 회복되면서 라인이 했던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채고는 슬픈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철푸덕.
역시 대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야. 라는 식의 헛소리를 잠시 내뱉던 힐렐은 지면의 부드러운 촉감을 온 얼굴로 느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라인"
"응?"
"너 내가 싫지?"
"응. 당연하지"
좀 지나치게 지친 터라, 힐렐에겐 화 낼 기력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힐렐은 침착한 목소리로 라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이젠 슬슬 해탈의 경지에 다가서는 것 같군. 근데 왜 내가 그리 싫다는거야? 네녀석 소원 들어주겠다는 건데"
"그럼 '성기사를 사랑하는 마검' 같은 농담이라도 기대한거냐. 게다가 소원이래봤자 결국은 살해계획일 뿐인데 죽여줘서 고맙다고까지 하라고?"
"응. 넌 그래야 하잖아. 게다가 생명이 없으니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 '살해'도 아니고"
"...좀 늘었군. 알았다. 길이나 떠나자"
마지막에 비겼으니 오늘의 말싸움은 비긴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힐렐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힘겹게 발을 뗐다. 아직 아침인데 쓸데없이 피곤한건 잠을 설친데다가 말싸움으로 초토화를 당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애써 연이은 패배를 무시해가며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며 힐렐의 등 위에 짐을 더해가고 있었다.
"...졸린걸"
전투 아니면 단조로운 풍경이라는 것은 꽤나 가혹한 환경이다. 도대체 흥미같은 것이 생길 수가 없는것이다. 날씨가 좋기는 하지만 더군다나 전날에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오죽하겠는가. 최악에 근접한 기분으로 걷던 힐렐은 결국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물론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대답이 나오면 그게 오히려 곤란하다.
"아, 그러셔"
곤란해지는 이유는 이 산에서 대답할 만한 것이 등에 메고 있는 라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700년 묵은 마검이라는 것은, 대화를 한다고 해서 이익이 생길 상대가 아니다. 그 700년이 그것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라인 한 번 쥐어본 사람치고, 제명에 죽은 인간이 없다.
"시끄러. 댁한테 말한거 아니니 신경 꺼"
이렇게 말하면서도 힐렐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까지 라인을 쥐었다가 죽은 인간들은 다들 말싸움하다가 신경쇠약으로 죽은건 아닐까? 그 가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신에게는 상당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그리고 그 가설이 석득력있게 들렸다는 사실은, 슬프게도 힐렐의 신경쇠약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러셔"
"칵... 아니, 됐다. 내가 바보지"
"응. 넌 바보야. 깨닫는게 느리군. 뭐, 이제 알긴 알았으니 다행이랄까?"
역시 자기비하란 것은 좋지 않다. 분개하려던 힐렐은 어차피 또 말싸움을 시작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라인의 입을 막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원래 같은 수법이 두 번은 통하지 않는 녀석이니 이번엔 버리고 간다고 해도 소용은 없을것이다.
뒤집어서 생각하자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계속 혼자 떠들게 만들면 되는 일이다. 700년 묵은 늙은이니 혼자 떠들라고 놔두면 아마 끝도없이 잘 떠들겠지. 듣는척 해주는게 말싸움해서 판판히 깨지는 것 보다야 백번 낫다. 여러모로 완벽한 계획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어쨌거나 힐렐이 말했다.
"야아, 라인"
"칠년 못본 친구 만난듯한 반가운 말투군. 아침 먹은게 잘못됐나? 아니면 조금 삐딱하게 삐졌나?"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도, 졸린데 뭐 이야깃거리 같은거라도 없어? 쓸데없이 오래 살았으니 뭐 있을거 아냐"
"있긴 한데 네녀석이 갑자기 느물거리니까 말하기 싫군그래"
요컨대, 이정도면 이미 반은 성공이다. 힐렐을 마음속으로 '인내!' 라고 외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뭐 굳이 그럴건 없잖냐. 말은 그렇게 해도 입이 근질거리지 않아? 게다가 내가 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라도 들면 너도 손해잖아?"
"허허. 이 젊은이가 갑자기 왜 이러나. 내 700년의 역사를 듣고싶다 이건가?"
늙은이 티 내긴. 그러니까 그 얘기가 하고싶었던 거군. 하고 힐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응. 들려줘"
"허어, 이렇게 희소성 높은 이야기를 공으로 들으려고?"
라인은 한번 더 튕겨보았다. 사실 희소성 높은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힐렐은 어차피 이야기의 내용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아, 아, 그래. 이번엔 한 번 져주지"
이야기가 굉장히 하고싶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라인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져주겠는가.
"빼지 말고, 이야기나 시작해 봐"
"후우, 그런가. 어떤 이야기부터 해볼까?"
2000년 07월 18일에 씀
2004년 09월 10일에 최종수정
아아, 묵은 티가 좀 나는군요, 이거.
하기사 2000년이면 고3때고...
어라라, 잘도 이런 걸 쓰고 앉아있었군요.
2004/09/10 01:18
2004/09/10 01:18
TAG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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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이거로군. 작은세계에 있지 않았던가??
제발 더 써주세요T_T!
GB//어어... 작은 세계에 원래 있던 거 저기 CREATURES로 옮겼다가 이번에 여기로 다시 옮긴거다. 뭐어, 지금 CREATURES도 없앨까, 하고 있고...
이샤//데꾹; 더.. 쓰겠..지요? 네에, 언젠가는,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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